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다를랑 (문단 편집) == 출생과 해군 입문 == 1881년 8월 7일, 남프랑스의 네라크(Nérac)에서 태어났다. 그의 가문은 유서깊은 해군 집안으로, 증조부가 [[트라팔가르 해전]]에 참전했으나 전사했다. 그러나 프랑수아의 아버지는 가문의 전통에서 벗어나 정계에서 활동했는데 아버지의 인맥이 나중에 제독으로 승진하고 해군을 재건하려던 다를랑을 지원하게 되었다. 대표적인 인물이 수 차례 해군장관과 총리를 역임한 조르주 레이그[* 11번이나 해군장관을 역임. 그의 이름을 딴 프랑스 해군의 [[경순양함]] 조르주 레이그 함은 2차대전 중 자유 프랑스 해군에 소속되어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에도 참가, 상륙병력 엄호를 위한 함포 사격을 했다.]와 알베르 사로로서, 두 사람 모두 다를랑 제독의 대부였다. 다를랑은 1902년에 프랑스 해군사관학교(École Navale)를 졸업하고 임관하였으나, 아버지가 [[드레퓌스 사건]] 당시 알프레트 드레퓌스 [[육군]] [[포병]][[대위]]의 무고를 옹호하여 아들의 정치적 성향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해군상층부에 의해 주류인 해상근무가 아니라 해군 기지의 해안포대 지휘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하여 주로 해군 지상부대에서 근무했다. [[제1차 세계 대전]] 때는 해군 육상 포병부대의 지휘관으로 [[베르됭 전투]]에 참전하기도 했다. 그의 동기 중 한 명이 바로, 전후 [[자유 프랑스]]에 스스로 투신한 유일한 제독이었던 [[에밀 뮈즐리에]]였다. 전후 해군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지상근무시 터득한 후방지원능력[* 주로 '''예산획득 및 관리'''능력이었다.]과 정계의 후원에 힘입어 승진을 거듭해 1929년에 [[소장(계급)|소장]], 1932년에 [[중장]], 그리고 1936년에 [[대장(계급)|대장]]이 되었으며, 1937년에는 해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올랐다. 1939년에는 1차대전 종전 이후 대공황과 해군군축조약 등으로 현상유지-방치상태나 다름없었던 프랑스 해군의 건함계획을 지휘하여 프랑스 해군을 재건한 공로로 [[원수(계급)|원수]]로 진급, 프랑스 해군에 오랫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원수 계급이 그로 인해 재등장했다. 원래 프랑스 의회가 수여하려던 원수 계급은 "아미랄 드 프랑스(프랑스 대제독)"로 격만을 따지면 왕정기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이 수여받는 프랑스 육군 대원수와 비슷한 것이었으나 다를랑이 사양하여 "아미랄 드 라 플로트(해군원수)"로 낙착되었다. 사실 프랑스 해군의 수백년 역사에서 아미랄 드 프랑스를 받은 해군 장교는 고작 일곱 명으로서, 두드러진 해전에서의 무훈이 없는 다를랑에게 이 계급이 주어진 것은 해군 재건에 다를랑이 크게 기여한 것에 대한 의회의 호평과 기대를 보여준 것이고, 이걸 사양한 것에서 다를랑의 정치적 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